어느 정도 정리된 결과 리포트까지 들고 "쓰기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말한 지 4개월만에 드래프트를 보냈다. 

여전히 초록과 서론은 없는 채...


논문을 쓰고 있자니 난 연구가 적성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곤 한다.

생각해보면 예전부터 공부는 곧잘했고,

시험은 공부한 양에 비해서는 잘 치는 편이었는데,

이걸두고 다른 사람들은 (특히 이모 교수와 그녀의 학생) "bottom line"을 잘 파악한다는 식으로 

나를 한 껏 추켜 세워줬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그냥 눈치가 빠른 것 뿐인게 아닌가 싶다.

남들만큼 진득하게 앉아서 공부하지도 못하고,

내용을 꼭꼭 씹에서 100프로를 이해하고 있지도 않은 채,

그냥 눈치 껏 이 맥락엔 이런 얘기라는 식으로 공부를 해온 셈이고,

그 결과는 이모양 이꼴?


천재가 아닌 개미 천문학자를 자처하면서 

베짱이처럼 살고 있으니 도무지 발전이 없다.


외국에서는 말도 잘 안통하니 그저 과묵한데

논문도 못 써내고 있으니

나의 천문학자로써의 실력은 어디쯤인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다.


뭐 이러는 것도 몇 년을 하다보니 패턴이 있어서

논문을 손에서 놓고 논문 쓰기 직전 단계까지 연구를 진행하다 보면

다시 자신감이 붙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문제는 이제는 논문을 손에서 놓을 수 없을 것 같다는 것...

보낸 드래프트의 후속 논문도 빨리 쓰기 시작해야하고

그러는 중에 지금 하는 연구가 마무리 되면 이것도 써야 할테니.


웅쌤과 이브에게 논문을 보내면서 자조섞인 어조로 (내가 생각하기에)

I'm really sorry that I'm so tardy in writing a paper.

라고 써서 보냈는데, 그냥 빈말이라도 격려를 해줬으면 좋겠다. 두 교수님 다.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Forehand in slow motion  (0) 2012.07.11
글쓰기, 문장론, 문체  (0) 2012.07.05
이순지  (0) 2012.07.03
위선  (2) 2012.06.26
프로페서 바수  (0) 2012.06.14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學費封套)를 받어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츰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블로그에 차분히 글 하나 쓰는 것도 괜히 힘들다.

페북에 실실 갈겨쓰면 가끔 내용이 꽤나 길어질 때도 있는데,

블로그는 왠지 좀 더 정돈된 글을 써야 할 것 같아 이리 저리 고민하다 그냥 말곤 한다.


하물며 논문은 어떠하겠는가?

시를 쓰는 사람이 시가 쉽게 씌여지면 그보다 행복한 일이 있을까?

상아탑 속에 스스로를 고립시켜 사는 "그저 학자"인 사람들을 보면

참 뭐하러 저렇게 사나 싶으면서도

그들이 키워온 자기가 해야할 일에 충분한 능력을 갖춘 모습이 부럽다.


캐나다는 남의 나라.

천문학자를 슬픈 천명이라 생각하면서도

논문을 한 줄도 못 쓰는구나.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일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도 쉽게 살지 못하면서

논문도 이렇게 어렵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아직 최초의 악수를 할 수가 없구나.


빨리 논문이나 써야지.

지난주부터 짐싼다고 설레발을 치다가
이제야 겨우 연구실에 있던 책을 박스 두개로 정리했다.

대학원 6년동안 쌓아 놓았던 논문을 버리다 보니
종이를 아끼기 위해서라도 아이패드를 사야겠다는
얼토당토 않은 주장이 설득력있게 다가왔다.

내가 버린 논문에 인쇄된 활자 중
내가 눈으로 본 것은 과연 몇 %이며,
실제로 읽은 것은 몇 %이고,
머리로 받아들인 것은 몇 %이며,
마음에 남은 것은 몇 %일까?  

내 논문은 과연 누가 인쇄를 하고,
누가 들여다 보지도 않고 버리고,
누가 제대로 읽어 보기라도 하며,
누구의 기억속에 남아 있을까?

내가 손때가 타도록 읽어서 너덜너덜하게 만든 논문처럼
내 논문도 누군가에게 그런 중요한 무언가가 될 수 있을까?

한동안 버려내고 비워내던 천문학자로써의 영욕이 다시 생겨난다.

좋은건지... 나쁜건지...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터넷의 노예  (0) 2011.09.29
술과 천문학  (0) 2011.09.03
별보라 MT  (4) 2011.08.15
술과 고기, 케잌으로 점철된 짧은 주말...  (2) 2011.08.08
운동 3일차  (0) 2011.08.02

방금 술먹고 와서 논문 제출을 마쳤다. 별거 아니지만 처음 하는 작업이라 이래저래 한시간이 걸렸다.

이제야 처음으로 corresponding author가 되었다

여러가지 이유로 애착이가고 괜찮은 논문이 완성된 것 같다.

여전히 글쓰기엔 이브의 도움이 컸지만... 뭐 갈수록 나아지겠지. 안되면 말고. ㅋ

빠른 레프리 리포트를 기원하며 슬 자야겠다.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미친 세상에  (0) 2011.06.19
restart  (2) 2011.06.15
[SNUV] 총장실 프리덤  (0) 2011.06.08
공동연구  (2) 2011.05.05
5회 한국-멕시코 워크샵  (0) 2011.04.2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