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테니스를 치는 '낙타'형은 소위 486세대다. 경희대 한의대를 나왔고 80년대 운동권이었다. 얘기를 들어보면 꽤나 격렬하게 운동을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한국의 경쟁위주의 교육체계와 MB시대에 대한 불만등을 핑계로 캐나다로 이민와서 한의원을 운영하며 좋아하는 테니스를 즐기고 있다. 느릿느릿하고 일면 어눌한 말투지만 얘기를 하다보면 내가 갖추고 싶어하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다.


토요일에 신나게 테니스를 치고 과음을 한 뒤 낙타형 집에서 자고 일어나 간단하게 라면으로 해장을 했다. 전날 과음하고 차를 두고 가신 분의 차가 주차장을 막고 있어서 오실 때 까지 집에 못가고 앉아서 간단한 얘기를 하며 책을 읽었다. 내가 한국에서 사와서 빌려드렸던 책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를 다 읽으셨다고 돌려주셨기에 아침에 기다리는동안 난 이 책을 읽고 있다가 형 책 중에 보고싶은거 좀 빌려 달라고했다. 책장을 죽 훑어 보는데 이것저것 보고싶은 책이 많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집어들고 옆을 보니 '김수영 평전'과 '김수영 전집 - 산문'이 있다. 시사 교양서 외에 문학책을 좀 읽어야 겠다는 생각에 '김수영 전집 - 산문'을 들었다. 하드커버에 두꺼운 책인데 김수영이 도통 누군지 모르겠다. 무식함을 드러내는게 내심 부끄러웠으나 낙타형에게 물었다. 


나: 김수영이 누구에요?

형: 김수영을 몰라? 김수영이 살아서 한국 문학계의 대부가 이어령이 아니라 김수영이 되었어야 했는데...


그리곤 이런저런 얘기를 해줬다. 김수영은 참여문학을 소리높여 주장하면서도 사회를 크게 바꾸지 못하고 현실에서 근근히 살아가는 소시민적인 모습에 항상 자학하고 괴로워 했다고 했다. 시를 주로 썼지만 본인에게 시보다는 산문이 읽기가 편해서 산문을 갖고 있다는 얘기도 함께. 


네이버 캐스트에서 여러 분야에서 깊이도 있고 흥미있는 내용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네이버에서 김수영을 검색해서 찾아보니 역시 네이버 캐스트가 읽을만 하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23&contents_id=6904) 읽다 보니 그의 무덤에 세워진 시비에 '풀'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앗! 내가 아는 시다. 이 시가 김수영의 시 였다니, 여태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고등학교때 수능 공부하면서 봤는지, 인터넷에서 떠돌다가 봤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시를 어디선가 봤을 때는 당연히 시인의 이름도 있었을테다. 그냥 흘려보내고 읽던 시가 김수영이라는 시인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나니 매우 다르게 읽혀진다. 고등학교때 그리 싫어했던 문학 수업의 수업 방식이 갑자기 이해된다. 치기어린 시절에 왜 시는, 또는 모든 예술은, 해석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지, 작가의 의도를 외워야 하는지,  창작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해야 하는지, 참 몰랐다. 받아 들이지 못했다. 보는대로 느끼는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되는게 아니냐고 항변했다. 수학, 과학처럼 누가 어디서 어떻게 봐도 똑같은 답을 내지 못하는 문학과 예술이 갑갑했다. 


지금도 안다고는 못하겠다. '김수영 전집 - 산문'을 읽고나면 이 시가 또 다르게 읽혀질까. '김수영 평전'을 읽고나면 또 다르게 읽을 수 있을까. 궁금하다. 30년을 자연과학에만 집중해 온 덕분에 요즘 인문학을 접하는게 새롭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마치 어렸을 때 천문학을 접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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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친구가 페이스북에서 친구신청을 해왔다. 이 친구는 흔하지 않은 진로를 선택해서 볼 때마다 나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는 친구다. 과학고등학교를 졸업해서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나같은 친구들, 공대에 진학한 친구들, 의대, 치대를 간 친구들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웠고, 문과로 바꿔서 경제, 경영, 법을 전공하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순수 인문학, 그것도 철학을 전공하는 친구는 이 친구 뿐이었던 것 같다. 그리 친하지는 않았고 많은 대화를 해본 것도 아니었지만 항상 배울 것이 많은 친구라고 생각했고 언젠가 더 깊은 대화를 하고싶은 친구였다.

대학도 같은 곳을 다녀서 지나다니며 한두 번씩 마주쳤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만남은 대학교 4학년때 였다. 천문대에 가느라 순환도로를 걷고 있는데 전파천문대 쪽에서 나온 이 친구를 만났다. 여기서 뭐하냐는 질문에 생각을 하느라 산책하고 있었다는 대답에 '참 너답다' 라는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친구에 대해서는 그런 이미지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천문학을 좋아라 하고 열심히 한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 친구도 철학과니까 사색을 즐길 것이라는 그런 '이미지'.

사실 그 친구의 '생각'이란게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현실적 고민이었을 수도 있다. 곧 군대에 간다고 했었는데 그런 고민. 내가 모르는 진로에 대한 고민. 아니면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이었을 수도 있다. 아쉽지만 우리는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니어서 개인사를 속속들이 알고있는 친함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인문학적 감성이라는 것은 단순히 이미지만은 아니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는 꾸준히 책을 읽고 사유하고 글을 쓰면서 그렇게 인문학적 감성을 발전시켜 왔을 것이다. 빠르고 자극적인 정보를 여러 대중매체를 통해 우겨넣기보다 조금은 천천히, 느리게 그렇게 자신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책과는 거리가 멀고 글쓰기가 어색하고, 깊이 생각하기보단 빠르게 생각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다. 어릴때는 그런 것이 불필요해 보였지만 요즘에는 나에게 부족한 인문학적 감성을 채우고 싶은 생각을 한다. 그 친구의 이름이 페이스북에서 떠오르는 순간 다시한번 자극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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