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임신하고 입덧을 심하게 한다. 12월 한달은 음식 냄새도 잘 못 맡고 토를 엄청 했다. 연말에 캐나다 처가에 다녀왔는데 장모님이 음식 챙겨주시는 동안은 잘 먹고 꽤나 멀쩡하더니 돌아와선 또 입덧을 하더라. 결론은 끼니를 거르지 않고 잘 먹어야 괜찮다는 건데 집에 있으면 직접 요리도 못하니 그러기가 어렵다. 미국에서는 배달음식도 잘 없고 매번 사다 먹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최근 일주일간은 내가 좀 신경써서 음식을 하고 간간히 외식을 하거나 음식을 싸가서 먹으니 좀 나아졌다. 덕분에 나는 최근 주부, 특히나 일하는 주부의 마음으로 살고있다.


이렇게 쓰고보니 내가 엄청 잘해주는 것 같은데 사실 처음 입덧이 시작했을 때는 뭘 해줘도 거의 먹지 못하거나 먹고는 다 토해버리고 냄새를 풍기며 음식을 하는 것 자체도 금지 당해서 짜증도 많이 냈다. 아내는 몸이 힘든건 자긴데 왜 짜증은 내가 내냐며 울면서 말했는데, 아직은 인간적으로 수양이 부족한지라 나름 이것저것 챙겨주고 해주는데 나아지는 건 없는 상황이 답답하기도 하여 의도치 않게 그런 반응이 나왔다. 입덧은 저녁에 더 심했는데 학교에서 집에 갈 때마다 몇 번씩 안그래야지 라고 다짐하면서 가도 집에가면 매번 툴툴거리고 신경질적으로 대하기 일쑤였다. 결혼생활은 참 쉽지 않다. (다시금 반성중.)


아무튼 꽤나 힘들었던 첫 한달이 지나고 호전되는 기미가 보여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부랴부랴 처가인 런던(캐나다)으로 갔다. 이상하게 따뜻했던 올겨울 날씨 덕분에 차를 몰고 갈 수 있었다. 일주일간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눈을 피해 새해가 되기 전에 돌아왔는데 오자마자 다시 토하는 모습에 헐. 며칠 괜찮다가 다시 입덧이 시작 됐는데, 결국 정기적으로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을 세끼 다 챙겨 먹음으로써 해결할 수 있음을 알게되었다. 다행히 냄새에는 조금 덜 민감해져서 요리가 가능해졌고, 어느 정도 이 상황을 감당 할 수 있게 되었다.


힘든 시기를 그래도 어느 정도 넘긴 듯 한데, 그래도 현재의 평화를 위해서는 내가 좀 애를 써야 한다. 요즘 모든 집안일을 혼자 다 하다보니 일하는 주부가 된 기분이다. 바깥일도 내가 혼자 하고 집안일도 내가 혼자 한다고 생각하니 좀 억울한 마음이 들 때도 많다. 사실, 바깥일, 집안일을 다 혼자 하는건 결혼 전과 마찬 가지지만 이게 기분이 참 다르다. 내가 나를 위해서 일을 하는 것과, 나와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일을 하는건 천지 차이다.  "임신한 아내"는 사실상 내 책임임에도 가끔 너무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걸 보면 인간은 참 간사하다. 그래도 지금은 초기의 잘못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 스스로를 잘 다스리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가, 전혀 다른 얘기지만, `만약 비슷한 일을 진짜 "노답 남편"을 위해 하는 거라면?' 이라는 상상을 해봤다. 오우, 생각만 해도... 매 끼니는 챙겨줘야 하는데 입은 까다로와서 아무거나 못 먹는다. 한번 해놓은 반찬으로 며칠 버티면 좋겠지만 하루 이틀이면 그것도 한계. 빨래를 하지 않는 건 당연하고 돌려놓은 빨래를 건조기에 넣는것도, 건조된 빨래를 개는것도 하지 않는다. 설거지는 손도 안 대면서 그릇은 엄청 꺼내 쓴다. 쓰레기 비우는 것도 청소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남편이 백수!


그런데 사실상 많은 주부들이, 특히 맞벌이 주부들이, 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정도 저런 삶을 살고 있다. 정확히 반반을 부담하는 경우는 아마 찾기 힘들거다. 많든 적든 50+를 여자들이 감당하고 있다. 만약 여기다가 애가 추가된 워킹맘이라면? 임신한 상태라면? 아, 세상의 여자들이여, 참으로 힘들게 살고 있구나. 처음 아내가 입덧으로 고생할 때 이브한테 여성 과학자들을 존경한다고 했는데, 지금 그 마음이 더 커졌다. 난 애도 안 낳으면서 이렇게 빌빌대는데, 참 대단하다.


그래도 애가 뱃속에 있을때가 편한 거 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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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일어나서 밥먹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밥먹고 예능보다가 운동가려고 마음먹었는데 졸려서 낮잠자고 다시 깨서 밥먹고 운동갔는데 문닫아서 운동도 못하고 돌아와서 다시 청소하고 영화를 보려고 한다.

초등학교때 일기쓰기라는 숙제가 있었는데 일기를 쓸 때는 '나는 오늘'로 시작하지 말라고 했었다. 이유인 즉슨 일기는 원래 내가 오늘일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나는 오늘로 글을 시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일기라는 것이 '오늘의 기록'이라는 단순한 의미라면 나름 납득이 가는 얘기지만 사실 그런 형식이란 걸 굳이 강요했어야 했나 싶다. 글재주가 없고 감성이 풍부하지 못해서 '나는 오늘'로 시작하지 않으면 글을 시작조차 하기 힘들었던 어린 시절에 일기쓰기는 고역 그 자체였다. 일기가 쓰기 싫으면 시를 쓰라고 했던, 지금 생각해면 참 어이가 없는 그런 숙제.

애시당초 일기를 숙제로 쓰라고 하는 발상 자체가 문제가 있고 그것을 검사한다는건 더더욱 문제있는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런 반 강제적인 숙제속에서 자신의 글쓰기 능력을 찾아내고 키워온 아이들도 있었을테니 그런 교육이 가지는 '효과'에 대해서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효과에 매몰되다 보면 중요한 것을 억압하는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이 경우에 그 '중요한 것'이 뭐라고 콕 찝어 얘기는 못하겠지만...

언제부턴가 '효율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에 대한 묘한 반감이 생겨나고 있다. 좀 느리고 게으르게 사는것도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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